미국 사람들은 왜 트럼프에 쉽게 끌렸나
[리뷰]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최근 재밌게 읽은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 이 책은 미국 사회가 왜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됐는지를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미국은 칼빈주의 청교도들이 세운 국가인만큼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성경 문자주의와 복음주의 신앙, 종교적 근본주의 등이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는 근면하지만 변화와 합리성, 지적 다양성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미국은 중요한 역사적 국면마다 합리적 이성과 과학을 주무기로 하는 엘리트들의 주도 아래 빠른 발전을 이뤘던 전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 사회의 기저에는 항상 종교 국가적 속성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
미국 사회는 때때로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음모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며 전문가, 학자, 지식인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호프스태터는 이런 반지성주의적 면모가 일회성 반응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경향적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태생적으로 미국이라는 사회의 유전자 자체가 반지성주의로 빠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런 반지성주의적 경향은 그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뒤에도 미국의 정치·사회·문화 발전에 심대한 위협을 반복적으로 가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아마도 트럼프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이 책은 1960년대에 출간됐다.
읽으면서 한국에서 최근 발생한 부정선거 논란, 각종 음모론, 그 속에서 명확한 정치색을 드러내는 개신교 집단 등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성경 문자주의, 복음주의 신앙, 종교적 근본주의 등이 반지성주의의 토양이 된다는 것도 공감이 갔다. 아무래도 한국 개신교는 미국에서 그대로 이식된 것이니까. 트럼프는 이런 유전자를 가진 국가에서 정치적 호응을 얻는 필승 보법을 찾아낸 셈이고, 아마 국내에서 개신교가 계속 교세 확장을 한다면 한국에서도 곧 트럼프의 보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지도자가 등장하게 될 가능성이 있겠다. 이미 정치적 반대편에 있는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종교적 근본주의는 진보-보수 진영을 따지지 않고 발현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흥미로운 지점은 반지성주의에는 그 자체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더 잘난 사람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효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네가 하는 행동은 반지성주의야'라고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반지성주의를 막아내기 어렵다. 호프스태터는 이 부분까지 다루지는 않았지만, 역사적 사례들에 비춰보면 미국의 엘리트들은 반지성주의가 극성을 부릴 때마다 지성주의의 명확한 효용을 보여줌으로서 그 국면을 극복해왔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요즘 국가 주요 R&D 예산을 사정없이 돌려깎고 있다. 예산 부족으로 대학원 입학이 취소되는 사례도 속출 중이다. 연방 교육부는 대규모 인력 삭감에 들어갔고, 곧 폐쇄될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지성주의적 목소리를 주로 담당해왔던 미국 민주당은 거의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다. 사회의 교육적 역량이 후퇴하면 지성도 후퇴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지성주의는 그런 측면에서 지금 명백한 위기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시민들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라가 두 쪽이 난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계엄 가능성에 불안을 겪고 있는 한국이 좀 더 위기에 가까운 상황일테니까. 과연 한국의 엘리트들은 윤석열이 불러 온 반지성주의 물결 속에서 자신들이 말해왔던 지성주의의 효용을 보여줄 수 있을까.